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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다산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 특별전 개최
관리자 - 2010.06.10
조회 5280
실학박물관 ‘다산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 특별전 개최


▶ 6월 12일(토)~10월 3일(일) 경기도 실학박물관
▶ ‘가장본 여유당집’ 최초 공개 등 관련 유물 전시 통해 다산 생애.업적.사상 재조명
▶ 다산의 ‘목민심서’ 주제 기념학술대회 개최 ‘현대 목민관’들에 다산의 메시지 전달
▶정약용의 실학은 조선 후기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개혁,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이 목표임. 정약용의 개혁 사상을 통해 현재의 민주주의 원류를 이해할 수 있음
▶정약용은 회갑을 맞이하여 그 간의 저술들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했고, 임종직전에 총 182책 503권으로 정리한 과정이 가장본 여유당집에 나타나 있음. 가장본 여유당집은 정약용의 개혁적 사상을 총괄한 저술로 특히, 그의 학문 발전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가장본의 중요성이 부각됨.
▶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및 미국 버클리대학 아사미 문고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본 『여유당집』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약용이 일반에게 공개하기를 원치 않았던 비본(秘本)과 다산이 직접 수정, 교열하였던 초고본 『여유당집』이 공개됨으로서 『여유당집』의 편집과정을 조명하고 있음.

한국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재조명하는 특별한 전시가 경기도 실학박물관에서 열린다.
실학박물관(관장 안병직)은 오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茶山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與猶堂集’ 특별전을 개최하고 이제껏 소개되지 않았던 다산의 <가장본 여유당집>을 최초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다산이 승례 혜장에게 지어준 시문첩인 <견월첩>을 비롯해 민간자치의 상비적인 방위체계를 구상한 <민보의>, 다산의 역작인 <경세유표>, <매씨상서평>, <매화도> 등 총 71건 2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다산 정약용은 18~19세기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로 그가 추구한 사상의 방향은 개혁·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민주주의 사상의 원시적 형태로서의 국가체제 개혁이었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1834년경 손수 정리한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남겨졌으며, 그의 총저작은 서목-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 64책 166권 등 모두 182책 503권에 달한다. 그 결과 1930년대 중엽에 이루어진 『여유당전서』는 거의 완벽하게 재편집될 수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본(家藏本)은 장서각(藏書閣)과 미국 버클리대학의 아사미문고(淺見文庫) 등에 소장되어 있다.
실학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본 여유당집> 등 실학 유물 전시를 통해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해보는 한편 다산의 저작들이 어떻게 정리되어 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 주고자 한다.
특히 오는 19일(토) ‘조선의 목민학과 목민심서’를 주제로 열리는 특별전 기념학술회의는 최근 지방선거를 맞아 새롭게 등장한 현대의 목민관들에게 관리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들에 대한 다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이 될 것이다.
<목민심서>는 다산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지방관들의 폐해를 방지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청렴·절검의 생활신조, 백성본위의 봉사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어 현대의 관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학박물관은 이 밖에 정약용초상 퍼즐맞추기, 미래실학자 인증서 발급 등의 체험코너를 상시 설치하여 학생.청소년 관람객들이 정약용과 실학사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부대행사로는 개막 당일인 12일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의 ‘경세유표와 개혁사상’ 특강에 이어 오는 9월 4일 송재소 실학박물관 석좌교수의 ‘다산 실학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주제로 한 특별강연회가 열릴 예정이다.

※ 문의전화 : 실학박물관 학예팀 양상훈 tel.031-579-6011


□ 전시회 개요

○ 전 시 명 : “다산茶山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與猶堂集”
○ 장 소 : 실학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및 로비 일부
○ 기 간 : 2010년 6월 12일 ~10월 3일
○ 전시대상 및 수량 : 총 71건 200여점
○ 전시목표 : ‘정약용의 유적지’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이라는 지리적인 배경을 토대로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을 집중 조
                 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함으로써 전시,연구는 물론 체험을 통해 그 사상을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


□ 개막식 행사

○ 일 시 : 2010. 06. 12(토) 14:00~16:30
○ 장 소 : 개막식 – 실학박물관 중앙홀 전시관람 –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
○ 행사내용 : 전시 소개, 축사, 전시관람, 리셉션, 특별강연회


□ 체험 프로그램

1. 퍼즐 맞추기
:3종의 정약용 초상화와 남양주 마현지역 옛지도를 퍼즐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에게 실학자 정약용의 다양한 얼굴을 소개
  체험하는 기회 제공
2. 미래실학자 인증서 발급
:전시 관련 퀴즈를 풀어본 후 자신이 미래 실학자라는 인증서를 만들 어 봄으로서 관람객들이 실용의 개혁 의지를 생활
  을 통해 실천해갈 수 있는 동기 부여


□ 특별 강연회


○ 특별 강연회 1
– 강사 : 김태영(실학박물관 석좌교수)
– 주제 : 『經世遺表』에 드러난 다산의 변법적 경세론
– 일시 : 2010. 6. 12(토), 15:30~16:30
– 장소 : 실학박물관 강당

○ 특별 강연회 2
– 강사 : 송재소(실학박물관 석좌교수)
– 주제 : 다산 실학사상의 철학적 기반
– 일시 : 2010. 9. 4(토), 14:00~15:00
– 장소 : 실학박물관 강당


□ 특별전 기념 학술회의

○ 발표주제 : 朝鮮의 牧民學 傳統과 『牧民心書』
○ 일 시 : 2010. 6. 19(토), 13:00~18:00
○ 주 최 : 실학박물관, 한국사상사학회 공동 주최
○ 발표 및 토론자 : 발표자 5명, 토론자 5명, 사회자 2명

구분

성명

소속

직위

발표(토론)주제명

1

5명

정호훈

서울대학교

hk연구교수

15~16세기 牧民書의 출현과 牧民學

김용흠
연세대학교
hk연구교수
《牧民攷》와 地方 統治
백승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8세기 牧民書에 나타난 賦稅制度 운영
김선경
서울대학교
규장각연구원
《牧民心書》와 茶山 牧民學의 성격
이숙인
서울대학교
hk연구교수
《牧民心書》속의 親族?家族


□ 전시 세부구성 및 내용

구 분

소주제

주요내용

프롤로그
실학의 종합

–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의 종합?국가체제의 개혁 [體國經野]
– 가계도와 연보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업적 설명

section #1 수학과
관료생활

– 가학家學
– 성호학파와의 교류
– 대과급제와 임관任官
–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 화성의 설계

가학과 성호학파와의 연관성 설명
정약용의 관료로서의 면모와 정조와의 관계 설명

section #2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과 경학經學

– 강진에서의 생활
– 학승과의 교유
– 강진 읍내에서의 생활과 교유
– 다산 초당에서의 생활과 교유
– 저술 활동

유배시기 학문과 사상 설명

section #3 마현馬峴으로의 귀향과 경세학經世學

– 초천苕川에서의 생활
– 저술 활동
– 문인文人과의 교류와 학문 논쟁

귀향 후 학문과 사상 설명

에필로그
《여유당집 與猶堂集》의 편집

– 여유당전서의 간행
– 정약용의 초상들
– 정약용의 호

실학 집대성의 결정판인 《여유 당전서》의 간행과정 설명


□ 대표전시유물 소개


1.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名錄
조선후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초계문신들의 명단을 정리한 자료이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문풍을 진작키 위해 37세 이하의 문신을 뽑아 열흘, 한 달 간격으로 경서經書와 시문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전최殿最로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1781년(정조 5)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약 190여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다산은 1789년(정조 13)년에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2. 정조보묵正祖寶墨
1795년(정조19) 경기도박물관 소장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에서 진찬進饌하면서 관화곡觀華曲에 맞추어 지은 시이다.

  봄날에 느릿느릿 북쪽 대를 오르니 春日遲遲上北臺
  이번 행차는 꽃 핀 경치 찾아온 게 아니라네. 此行非是?花開
  새로운 시를 지어서 관화곡을 다시 잇고 新詩更續觀華曲
  만세토록 길이 만세의 술잔 따르리. 萬歲長斟萬壽杯

3. 정약용 초상 丁若鏞 肖像
김호석 작(2009) 96cm×178cm, 강진군 소장
지금까지 알려진 다산의 초상화는 5~6종이다. 모두 일제강점기 이후 그려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가장 최신작으로 안경을 쓴 다산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조선후기 서양문물의 영향과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려는 의지, 방대한 독서와 저술 등의 학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4. 정약용 편지
19세기초 , 강진군 소장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새로 보완한 『자휘字彙』(명나라 매응조 梅膺祚가 편찬한 字書)의 선본과『물명고物名攷』(일상의 어휘를 21개 분야로 나누어 한자와 한글을 표기한 사전) 등의 책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다산은 이를 빌려 필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 연구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정약용 편지
1811년(순조11) 나주정씨종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1811년 2월 그믐에 제자 중 한사람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1810년 큰아들 학연이 부친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해배의 움직임이 있자 자신이 강진을 떠나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若銓(1758~1816)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자산玆山(흑산도)으로 머리를 돌리면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는 말에서 그의 형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다..

6. 두강승유도 斗江勝遊圖
조선후기, 이건필 작, 개인 소장
이건필李建弼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마현의 두강斗江[두물머리]을 배를 타고 유람하며 그린 풍경도이다. 다산 역시 두강에서의 고기잡이, 유람 등을 즐겼으며, 특히 갈대 우거진 집 앞 초천苕川의 풍경을 사랑하였다.

7. 시경강의詩經講義
19세기 필사본(15권5책) 복제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1791년(정조 15) 가을 시사試射에서 성적이 나빠 왕이 북영北營에 있게 명하고, 『시경』8백여장의 조문條問을 내려 40일의 기한을 주며 대답하게 하자 이 조문 하나 하나에 대해 강술한 것이다. 본집 11권 4책, 보유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보유는 정조의 조문에 미치지 못한 것을 1808년(순조 8)에 다시 지어 합편合編하였다. 표지서명은 『시경강의』이고, 우측 상단에 책1부터 책4까지는 ‘어문御問’과 그 권수가 표기되어 있으며, 책5에는 보유補遺와 그 권수가 기록되어 있다. 각 권이 시작할 때마다 『여유당집』 권1~권15를 표시하여 여유당집 전체 체제에서 이 자료의 편차를 알 수 있게 하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두주가 있고, 몇 곳에서 내용 보충을 위해 첨가한 띠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열수洌水 정용丁鏞 저著’로 되어 있다. 내지에 ‘윤정기인尹廷琦印’, ‘방산舫山’, ‘경림景林’의 장서인이 찍혀 있어 다산의 외손인 윤정기의 소장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8. 매화도 梅花圖
가로 54×세로 25㎝
조선후기, 정약용 작, 고려대박물관 소장
묵지墨紙로 된 부채 위에 은니銀泥로 그린 매화그림이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은 나무와 양쪽으로 뻗은 줄기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가 조정과 멀어졌음에도 항상 그곳을 향한 다산의 마음을 그린듯하다.

9. 경세유표經世遺表
19세기
필사본(가장본 13권5책)
‘경세유표’의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에 해당하는 가장본이다. 표제는 『여유당집』으로 되어 있고, 우측 상단에 ‘방례초본邦禮艸本 경세유표經世遺表’라고 쓰여 있으며 책4부터 책9까지 5책으로 되어 있다. 또 책1부터 책4까지는 각 책마다 ‘전제田制○’라고 하여 권1부터 권12까지 구성하였는데, 1책 3권으로 되어 있다. 또 책5는 ‘양전의量田議’ 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3종終’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자는 ‘부루負累 신臣 정용丁鏞’으로 되어 있고, 몇 곳에서 붉은색의 두주가 확인된다.

10. 목민심서 牧民心書
19세기
필사본(李家源先生蒐集本, 권7~9, 1책 영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목민심서』49권 16책중 7~9권 1책이다. 『목민심서』는 강진에서 이루어진 초고본과 마재에서 이루어진 완성본이 있는데, 이 책은 완성본에 가까우나 완성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사본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완성본의 본문에 들어가야 할 기사들이 아직도 두주나 보유로 가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아직도 『여유당집』이라는 표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1822년 자찬묘지명이 이루어지기 이전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 『목민심서』는 국내외적으로 현재 1백여종이 넘는 필사본이 존재하지만, 가장본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앞으로 새로운 가장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책이 가지는 가치는 무한하다고 할 것이다.

11. 여유당집與猶堂集 상서평尙書平
19세기
필사본(李家源先生蒐集本, 권1∼3 1책)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채화정菜花亭은 다산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의 집 부근에 새로 지은 작은 정자의 이름이다. 『여유당집』의 별칭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내용은 『상서평尙書平』1~3의 부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매씨서평』1∼3권인데, 1810년에 이루어진 초고본이다. 책 첫머리에 『여유당집』권16이라는 표기가 있으므로 이 책은 1822년의 자찬묘지명에서 『여유당집』의 서목이 정리된 이후의 사본으로 보아야겠다. 그리고 이 책의 뒷장표지에는 ‘근세우유풍희고문위상서近世又有豊熙古文僞尙書’라는 주기注記가 있는데, 이 주기는 이 책의 소유자가 뒤에 임의로 가필한 것 같다. 현재 『매씨서평』1~4권의 초고본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 가치는 무한하다 하겠다.

12. 여유당집與猶堂集 잡문雜文 8
조선후기
필사본(가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가장본 중 ‘여유당집 잡문雜文8’ 혼돈록??錄에 해당한다. 다른 가장본과 비교하여 수정할 곳으로 지적한 부분이 가장 많은데, 대부분 삭제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오약산 吳藥山」,「채류세겸蔡柳世謙」,「이참판만회李參判萬恢」,「이백주李白洲」,「인묘피참仁廟被讒」등 20여 항목 이상은 아예 삭제를 뜻하는 ‘산刪’자를 내용 중앙에 크게 써놓았다. 간혹 추가되어야 할 내용을 두주에 밝히고 ‘∞’를 하기도 하였으나, 삭제되어야 할 부분에 비해서는 적다. ‘혼돈록’이 『여유당전서』에서 제외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3. 열수전서洌水全書 속집續集8(墓誌銘, 秘本)
19세기
필사본(가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소장의『열수전서』속집 10책 중의 제8책이다. 이책은, 이가환李家煥, 이기양李基讓,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및 본인의 묘지명이 실려 있는 것인데, 그들은 모두 신유사옥으로 장살杖殺되었거나 유배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묘지명은 그들을 박해한 자들을 원망하는 글이거나 원한에 찬 글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비본으로 처리한 것이다. 다산의 가장본을 검토하는 한 이 이외의 비본은 없다. 따라서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술」과 「비합법적 저술」이 있다거나 한간에 『경세유표』가 혁명적 저술이기 때문에 전봉준이나 호지명이 애독하였다는 풍설은 완전히 신화임을 알겠다.

14. 민보의民堡議
조선후기
필사본(가장본 3권1책)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조선후기 속오군제束伍軍制가 무너져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서 민간자치의 상비적인 방위체계를 구상한 자료이다. 민보군民堡軍이 민간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관군과 구분되고, 전략요충지에 민보民堡를 설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점에서 방위 체제의 새로운 구상이었다. 1812년(순조 12)에 저술하였다. 표지에는 『사암별집』이라 되어 있고, 우측 상단에 ‘민보의民堡議 전全’이라 표기하였다. 여유당집 권181~권183에 편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학과 관련한 저술들과 달리 ‘별집別集’으로 분류되어 있다.

 

□ 다산 정약용

다산은 어떤 실학자인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9세기 초에 18세기 전반기의 경세치용학과 18세기 후반기의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종래의 한국 실학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기시대의 과제를 파악하고, 둘째 육경사서六經四書를 궁구하여 유학의 진수眞髓를 체득하고, 셋째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는 서양문물을 흡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총체적 개혁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개혁·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다산이 이러한 개혁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그의 천품이 남달랐던 점도 있었지만,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받아들이고, 40대 중반에 맞은 중풍의 병고病苦를 굳센 의지로 이겨낸 바와 같은 그의 참 용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자연철학의 신봉자로서, 지구가 하루에 9만리를 돌듯,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야 무엇인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통하여 간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의 개혁사상은 워낙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으므로 한 두 분야로써 소개하기가 어렵지만, 이를 국가체제의 개혁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새로운 군신 관계의 정립이다. 왕조체제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주권이 군주에게 있는 것으로 이해되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래 통치자는 인민이 추대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군주가 비록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통치권은 인민을 위하여 행사될 때만이 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자유주의와 인권사상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민주주의사상의 원시적 형태임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국가체제이다. 전통적으로 왕조체제하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는 정전법井田法 체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정전법 체제는 농촌 체제일 뿐이다.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존재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국가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체제가 ‘체국경야體國經野’이다. 체국경야 체제 하에서는, 상공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되고, 농민군과는 달리 상비군 제도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농업은 상품작물의 재배를 기초로 하는 다각경영이 이루어지며, 상공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도입된다.
위와 같은 사상을 전개하기 위하여 다산은 500권 180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남겼다.

암행어사 다산茶山이 바라 본 민생民生
1794년(정조 18) 다산은 경기도암행어사가 되어 민생을 살펴본다. 그가 맡은 지역은 적성·마전·연천·삭녕 등 4곳이었다. 전 연천현감이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주고 재결을 도둑질한 사실, 전 삭녕군수가 지나치게 화전火田에 세금을 물리고 향임鄕任들에게 뇌물을 받은 사실 등을 발각하였다.
이때 다산이 본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세 살 먹은 아이가 군적軍籍에 올라 있고, 다섯 살 먹은 아이가 기병騎兵으로 등록되어 있어 두 아들의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아무 것도 남지 않아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또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자 닷 말을 금년에도 갚을 엄두조차 내지 못해 살 길이 막막하지만, 관가에 끌려가 곤장 맞을 일 보다는 갑자기 문밖에서 들이닥칠 나졸들의 행패가 겁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개 팔자보다 못한 것이 백성들의 삶이었다.

다산과『여유당집與猶堂集』
1822년은 다산의 갑년甲年이다.『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의 1822년 조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올해는 공의 갑년이 돌아오는데, 육경사서지학六經四書之學과 경세실용지학을 끝냈으 니, 천하에서 할 만한 일은 모두 끝낸 셈이다. 하늘 및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과 생 사 및 변화의 근본을 체험했으니, 다시는 저술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자찬묘지명自撰 墓誌銘」을 지었다”.

과연 그는 갑년에 저술활동을 마감하고 그의 저작을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회갑을 맞아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짓는다. 묘지명의 내용은 가계家系, 관직생활, 18년동안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과 경학 연구, 1818년 마현으로의 귀향 등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고 있다.
묘지명에서 밝혀진 그의 저서는 육경사서에 관한 연구인 경집經集이 232권이요, 시문집과 정법집으로 구성된 문집文集이 260권으로서, 모두 492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경세유표」(49권)와 같은 미완성작품이나 「아방비어고我邦備禦攷」(30권)와 같은 미성립 작품이 들어가 있으므로, 완전한 서목書目이라 할 수 없다. 최익한崔益翰이 지은 『실학파와 정다산』에 실려 있는 「열수전서총목록」에는, 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 64책 166권으로서, 모두 182책 503권이다. 이 총목록은, 그의 「최후수정가장본最後手定家藏本」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하므로, 다산이 73세경에 최후로 손수 정리한 서목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산은 정말로 회갑 이후에는 저술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연을 완상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생활했다. 그 때문에 그가 회갑 이후에 남긴 글은 주로 소수의 시와 기행문뿐이다. 그러나, 그 외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61세 때에 신작申綽과 나눈 육수육향六遂六鄕에 관한 논쟁과 66세 때에 홍석주洪奭周가 염약거閻若璩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을 기증해옴으로써 1834년에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과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을 『상서고훈』(21권)으로 합편하고 『매씨서평』을 수정한 것이다.

다산은 회갑 이후 그의 저서를 『여유당집』으로 정리했다. 『여유당집』은 『여유당문집』, 『열수전서洌水全書』, 『사암경집俟菴經集』 및 『사암별집』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지만, 모두 『여유당집』의 별칭에 불과했다. 현재 남아있는 책 수가 많지는 못하지만, 장서각藏書閣과 버클리 대학의 아사미문고淺見文庫 등에 보존되어있는 가장본『여유당집』을 검토해보면, 이러한 점은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30년대의 중엽에 이루어진 『여유당전서』는 거의 완벽하게 재편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든가 ’,『경세유표』를 호지명이 읽었다’든가 하는 등의 신화가 있어왔는데, 이는 가장본의 검토에 의하여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다산은 1822년에 지은 자신의 묘지명(집중본)에서 『여유당집』의 전체 체제와 권수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꾸준히 저술을 수정, 분합分合하여 만년인 1834년경에 최후 수정手定한 『여유당집』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과 가장본『여유당집』
다산은 1801년의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된다. 그는, 유배를 학문을 완성하라고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유배생활 18년간을 오로지 학문탐구에 매진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아전 제자 6명과 양반제자 18명을 양성하고, 「저작연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배기간 내내 한 해에도 수종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가 그렇게 왕성하게 저작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저술에 있어서 자료조사, 필사, 정서 및 제본 등의 작업을 제자들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과의 공동잡업 덕분으로 한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귀향 이후에도 『흠흠신서』를 저술하고 경세학에 관한 저술들을 수정하는 등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저술활동을 계속했으나, 회갑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정열적으로 행해오던 저술활동을 잠시 멈추고 그간에 이루어진 저술들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한다. 임종 직전의 1834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열수전서총목록」에 의하면, 유경사서六經四書에 관한 연구로 구성된 사암경집俟菴經集이 88책 250권, 시, 서 및 잡문으로 구성된 문집이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이 64책 166권으로서, 모두 182책 503권이다. 위와 같이 『여유당집』은 그의 생존시에 거의 완벽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출간된 『여유당전서』가 완전하게 편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유당전서』는 『여유당집』과는 목차의 순서가 조금 다르다. 현재 장서각, 버클리대학의 아사미淺見문고 및 기타 각 기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는 가장본『여유당집』을 가지고 이 점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본 『여유당집』과 「열수전서총목록」은 그 편차編次가 경집, 문집 및 잡찬으로 서로 같으나, 『여유당전서』의 그것은, 시문집, 경집 및 잡찬에 해당하는 정법집으로서 시문집과 경집의 순서가 바뀌어있고, 각 편내의 목차도 다소 재조정되어있다. 그러나, 편차의 순서가 다르다고 혀여 수록된 저작들이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여유당전서』에서는 동일한 저작인 경우, 최후의 수정본을 수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여유당집』에는 있는데, 『여유당전서』에는 수록되지 못한 저작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보의民堡議』와 「혼돈록餛飩錄」이다. 『민보의』가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비어고備禦考』30권이 자료수집 단계로서 아직 저술의 단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혼돈록』이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여유당집』의 단계에서 이미 불완전한 저서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가장본의 「혼돈록」에는 많은 곳에 붉은 글씨로 ‘산刪’ 또는 묵서墨書의 x표시가 있다. 만약 이러한 표기가 다산에 의한 것이거나 다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이 가장본은 다산 재세시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가장본 중에는 유일하게 ‘비본秘本’이라 표기된 것이 있다. 『열수전서』속집8 「묘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가환李家煥, 이기양李基讓,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및 본인의 묘지명인데, 이들은 모두 신유사옥에서 장살杖殺되었거나 유배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묘지명들은, 원한에 맺힌 글이거나 자기들을 핍박한 자들을 비난하는 글로서, 비석에는 다 새길 수 없을 정도로 그 글의 분량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다산은 이것만은 「비본」으로 해 둔 것인데,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규장각 소장의 『여유당집』에는 이 글이 빠져있다. 그리고 가장본『여유당집』을 검토하는 한 이 이외의 비본은 없다. 그러므로 최익한 저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던가, 세간에서 널리 떠도는 바와 같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가 혁명적인 저술이기 때문에 전봉준과 호지명이 애독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완전한 신화神話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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