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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행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 추진설명회』개최!
관리자 - 2008.11.20
조회 1025






23일 낮 12시30분 북한산성 행궁지에서 열릴 계획
▶ 북한산성 행궁지에 대한 보존 및 활용방안 모색, 방향성 제시 목적

경기문화재단과 고양시는 조선시대 후기, 임진란과 양대 호란을 겪은 후에 축조된 북한산성 행궁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하기 위한 ”북한산성 행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 수립”과 관련한 추진설명회를 23일(일) 낮 12시30분부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원의 북한산성 행궁지에서 김문수 경기지사, 강현석 고양시장 및 학계 관계자, 고양시민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한다.

이날 설명회는 경기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산성 행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 수립 사업과 관련, 학계 전문가와 일반인들의 관심을 촉발하는 한편 행궁지에 대한 보존 및 활용방안을 모색하고 방향성 제시에 목적을 두고 있다.

북한산성의 축조를 지휘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성능(聖能)선사의 ”북한산성과 행궁의 축조는 만세를 염두에 둔 심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는 말처럼 북한산성 행궁지는 외적에 대한 도성 방어의 호국의지를 모아 축조된 행궁으로서 다른 행궁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국토가 유린되는 비참한 현실을 경험한 위정자들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고 도성이 함락 되었던 까닭은 도성이 적에게 점령되었을 때에 도성 가까운 곳으로 피난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도성과 인접한 곳에 요새지를 찾아서 새로운 산성을 축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1659년 효종은 송시열에게 산성 축성에 대한 것을 논의케 하였고 이후 숙종조에 들어오면서 산성축성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1711년(숙종37년) 4월부터 축성이 시작되었는데 북한행궁은 궁전으로 산성의 중심이자 최고의 요충지에 터를 잡았다.

1772년(영조 48) 4월 영조께서 선왕인 아버지 숙종을 추모하기 위해 거둥 할 때 길이 험해 가마를 움직일 수가 없자 다섯명의 장정이 번갈아 임금님을 업어서 행궁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행궁 아래의 산영루(山暎樓) 계곡은 천하의 절경으로 선비들이 한여름에 탁족(濯足)하고 시를 짓는 명소였다.

북한산성 행궁(行宮)은 상원봉(上元奉) 아래쪽에 동북방으로 전개되어 있다. 북한산성의 축조를 기록한 성능(聖能)선사의 북한지(北漢誌)에는 행궁의 규모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내전(內殿)은 28칸(間) 인데, 좌우상방(左右上房)이 각각 2칸, 대청(大廳)이 6칸, 4면퇴(四面退)가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또 좌우행각방(左右行閣房)이 9칸, 청(廳)이 5칸, 중문(中門)이 1칸이다. 또한 대문(大門) 3칸, 수라소(수라소) 5칸, 중문(中門) 1칸, 측소(厠所) 2칸이 있다.

외전(外殿) : 28칸인데 모든 체제는 내전과 같다. 대문(大門) 3칸, 북협문(北俠門) 1칸, 외북장중문(外北墻中門) 1칸, 외행각방(外行閣房) 12칸, 루(樓) 4칸, 청(廳) 4칸이 있고, 또 헛간(헛간)이 2칸, 중문(中門) 2칸, 외대문(外大門) 3칸, 북변외대문(北邊外大門) 1칸이 있다.

※ 1712년 숙종38년 숙종이 북한행궁에 거둥 하실 때 지은 어제시(御製時)
間關十里到行宮 도성 10리 거리의 행궁(行宮)에 이르르니
猲猲柴丹卽在東 높고 험한 시단봉(柴丹峯)이 바로 동쪽에 보이는구나
露積峯頭雲未捲 노적봉 머리엔 아직도 구름이 덮혀있고
白雲臺上霧猶朦 백운대 위에는 안개가 몽롱하다

☆ 담당 :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 신명종(031-898-7990(교 514)














북한산성행궁지(北漢山城行宮址) 현황
 □ 문화재명 : 북한산성행궁지(사적 제479호, ”07.6.8 지정)
 □ 건립시기 : 조선후기(숙종37년, 1711∼1712)
 □ 위 치 :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169일원
 □ 면 적 : 11,388㎡
 □ 연 혁 : 공사기간 (1711년 8월 ∼ 1712년 5월. 9개월)
  – 1711년 8월 17일 개기 길일로 정하여 공사 진행 -『배릉등록(拜陵謄錄)』
  – 1711년 8월 29일 행궁영건청 설치
  – 1711년 10월 내전 상량 완료, 외전 미건립
  – 1712년 5월초 수라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완성
  – 1712년 5월중 완공
  – 1712년 6월 9일 공사 참여 관리자 및 원역, 공장에 대한 시상
  – 행궁 완성 후 중흥사 터가 더 낫다고 하여 다시 옮겨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음
  – 영조대 증축
  – 1832년(순조 32)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피해. 이듬해 산성과 함께 수리
  – 1879년(고종 16) 홍수로 인하여 수리
  – 1892년(고종 29) 수리 결정 이후 다음해까지 공사 진행
  – 1915년 관야정(關野貞)의『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수록(1902년 조사)
  – 1915년 8월 대홍수로 일부 파괴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체된 것으로 추정

 □ 규 모
























































내전


내전
부속건물


수라소


측소


외전


외전
부속건물


비고


총칸수


『북한지』
1745년 (영조 21년)


28칸


28칸


5칸


2칸


28칸


33칸



124칸


『만기요람』
19세기 초(1808년 경)


28칸


18칸


6칸
(수라간)


3칸


28칸


46칸


5칸 증건


129칸


『동국여지비고』
고종초기


28칸





28칸



①∼④
합 : 73칸


129칸


 □ 역대 왕의 북한행궁 이용 기록
























행행(行幸) 일자


행행 내용


숙 종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산성, 행궁 조성 시찰


영 조


1760년(영조 36) 8월 20일


행궁 시찰


1772년(영조 48) 4월 10일


선왕 행행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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